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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사무엘하] 6장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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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61회 작성일 2024-08-26 12: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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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사의 죽음>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1-2)

 

 다윗이 두 번 블레셋의 침입을 막으니까, 무언가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자기가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오는 것이지요. 좋게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에서 섬기고 싶은 신앙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왕이 되어서 언제 어떻게 자신을 배반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그런 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시기를 원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왜 절대 권력자들이 사실은 더 종교에 깊이 빠지는 지 생각해 보면, 젊을 때에는 자기가 힘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반역하는 자는 힘으로 다스리려고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힘이 빠지면, 또 다른 정적이 자신을 해치고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권위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 종교의 힘을 빌리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다른 짐승들과는 차이점이지요. 

 

 그래서 대개 역사를 보면, 왕정시기에는 ‘왕권신수설’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의 사상을 백성에게 주입합니다. 다윗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래서 사울이 죽었을 때, 왕위를 계승받을 정당성이 있게 된 것 아닙니까? 사울도 처음에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해서 초대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쩌면, 자신의 왕위를 더 공고히 하고자 법궤를 이용하려고 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시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3)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가문이 몰락할 때, 여호와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여호와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 보냅니다. 그 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열어 보다가 또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급한 대로 아비나답의 집에 두게 되었었지요. 그때, 법궤가 주로 수레에 싣고 움직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일을 진행시킵니다.  

 

 율법에 따르면, 레위 출신의 제사장들이 법궤를 어깨에 매고 모시고 와야 하는데, 어떤 절차나 규칙을 무시하고 다윗은 그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이런 모습이 흡사 우리들의 신앙의 태도가 아닌가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내 생각과 내 판단, 내 열심만으로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자행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전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내 만족과 내 감정에 휩쓸려서 내가 기쁘면 목회자의 조언이나 관여는 무시합니다.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4-5)

 

 여기 그들은 다윗이 이 법궤를 위해서 준비시킨 3만 명의 사람들입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음악가, 연주가들이 동원되어서, 큰 퍼레이드를 펼칩니다. 100~200명도 악기를 연주하면 대단할 텐데, 3만 명이 법궤를 둘러 쌓으니 얼마나 큰 행렬이겠습니까? 말 그대로 ‘왕의 행차’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기쁜 날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6-7)

 

 이 법궤를 옮겨오는 중차대한 행사에 아마도 ‘웃사’라는 사람이 행사기획을 맡은 것 같습니다. 우리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 의전비서관 같은 사람이지요. 소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니 갑자기 소가 날뜁니다. 아마도 천사를 본 것이겠지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니 웃사가 법궤가 땅에 떨어질까봐 급하게 붙잡았는데 웃사가 죽어버립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8)

 

 ‘페레츠 웃사’ 웃사를 치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셨다는 의미지요. 그런데, 다윗이 화를 낼 까닭이 무엇입니까? 참 어이없는 반응인데, 하나님께 화를 냈다는 말인지, 주위 신하들에게 역정을 냈다는 말인지.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9-10)

 

 웃사의 죽음을 보고, 다윗도 함부로 법궤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뒷수습을 하는데, 오벧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메어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아무도 법궤를 두려워서 모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때 등장하는 한 사람 ‘오벧에돔’. 그 이름의 뜻은 이렇습니다. ‘에돔의 종’, 그리고 가드는 블레셋의 가드 땅을 말하기 보다는 ‘가드림몬’ 즉, 단 지파의 지역으로 기럇 여아림과 예루살렘 중간 즘 되는 곳입니다.  

 

 오벧에돔이 그 가드 지역에 레위사람으로서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수습하고 법궤를 모시게 됩니다. 약 3개월을 모실 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3개월 만에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윗이 오벧에돔을 보고 다시 법궤를 모실 마음이 생기지요.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1)

 

 우리는 웃사와 오벧에돔을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데, 정말 사심없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겼던 오벧에돔은 온 집안에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웃사는 자신의 방법, 생각대로 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각과 마음 자세로 하나님을 모시고 계십니까? 자신의 욕망이나 자신의 계획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과 법을 어길 것이요. 스스로 저주를 자초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벧에돔과 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라도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면, 그 사람 뿐만 아니라 온 집안에 주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2-14)

 

 지난 번과 다르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는 모습으로 베옷을 입었습니다. 왕복과 화려한 의복은 치워 버리고, 지난 날에 죄과와 허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메게 합니다. 자신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이지요. 그 때에야 다윗은 법궤를 모실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리 화려한 옷과 여러 가지 악기를 동원한 찬양과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가장 중요한 우리의 자세는 ‘회개’와 ‘자복’,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겸손한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대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스스로 기뻐하고 자랑하고 과시까지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없으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다윗은 온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 앞에 어리광을 부리고 찬양을 올립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하의가 ‘실종’(?) 되는지도 모르고 춤을 추면서 왕궁으로 들어오는데, 아내 미갈이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을 냅니다. 왕이 체통 없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런다는 것이지요.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5-16)

 

 그리고 다윗을 업신여깁니다. 그래서 법궤를 왕궁 안으로 모시는 행사를 다 마치고 들어오는 다윗에게 미갈이 한 마디를 하지요.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0)

 

 다윗은 온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미갈도 함께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사를 구경하고, 왕의 벗은 몸에 대해서 비난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분노하지요. 다윗은 자기 집 사람들에게 축복하러 왔는데, 미갈을 저주를 받습니다. 법궤를 모시는 행사에 온 백성들에게 다윗이 축복하며 떡도 돌리고 기념품도 돌렸는데, 다윗의 가장 가까운 아내이자 왕비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갈은 법궤를 왕궁으로 들여 놓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버리니, 그와 그의 온 자녀들과 그를 따랐던 신하들까지 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전장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미갈은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 모든 원망과 분노를 남편인 다윗에게 쏟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21-23)

 

 미갈은 그래도 사울의 딸로, 공주에서 왕비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마지막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었는데, 이러한 말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다윗의 마음에서 미갈은 지워진 것이지요. 왕비라고 하더라도 그녀에게서 아무런 자손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쓸쓸히 노년과 노후를 보내게 됩니다.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미갈의 이 한 마디에 온갖 불신앙과 원망이 가득담겨 있는 것으로 다윗이 느꼈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네 집을 버렸다고 확인사살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미갈이 다윗을 깔보고 아직도 자기가 다윗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온 이스라엘의 왕인데, 함부로 입을 놀려서 왕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떻합니까? 자기 인생만 비참하게 되었지요. 반대로 우리 성도들이 말 한 마디 잘해서 어떤 영광을 얻게 됩니까? 말 한마디에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의 구주로 고백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혜와 은총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혹여라도 하나님 앞에 불만과 원망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할 것 뿐입니다. 미갈이 다윗에게 ‘정말, 잘 하셨어요. 법궤를 모셔서 참 기뻐요!’ 하면서 다윗의 행사에 대해서 칭찬했다면, 다윗은 미갈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단 한 마디에 정 떨어지게 만들고, 사랑받지 못하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려고, 자신의 생각대로 믿고, 예배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은 없는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은 없는지’ 항상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먼저 주님을 기뻐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불순한 생각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웃사라는 사람, 그리고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본을 받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할 지 깊이 생각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방법대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다윗이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자신을 겸비하고 모세의 율법대로 레위인들이 법궤를 메게 했을 때, 다윗 성으로 모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예배에 실패하더라도,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 우리의 행실을 고치고 마음을 가다듬어 바르게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미갈은 법궤를 모시는 일보다는 남편 다윗의 허물에 주목했고,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의 인생을 망쳤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게 붙들어 주시고, 언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과 행실로 우리의 삶도 윤택해지고 다른 이들도 윤택하게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속자이신 만왕의 왕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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